<본 글은 수년 전 돌아가신 노모(老母)가 생전 90세를 바라보는 2012년에 쓴 글임>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한 달이 넘도록 집을 비운 채 한참 동안 있다가 돌아왔다. 우리 집은 고층 아파트 십일 층 맨 동쪽 끝 집이라 비상구 문을 열면 공간(空間)이 있어 빈 화분 하나가 항상 놓여 있다. 오랜만에 비상구 문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니 빈 화분에 메추리 알만한 알 두 개가 놓여 있었고 만져 보았더니 아직 따뜻했다. 밑바닥에는 지푸라기 몇 개를 얼기설기 깔아 놓고 깃털도 몇 개가 빠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비둘기의 소행(所行)인 것 같았다.
몇 시간 후 문을 다시 열어 보니 내 생각과 다름없이 비둘기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앉아 있었으며 내가 가까이 접근해도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알을 품고 있기에 살짝이 문을 닫고 나왔다. 수컷은 망을 보고 있는지 한 번씩 왔다 갔다 할 뿐이고 암컷은 부화(孵化)를 시키느라고 먹이 사냥도 못해서인지 털에 윤기도 없고 꺼칠꺼칠하게 보여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의 이치(理致)는 동일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에 동정심이 생겨서 성의껏 보살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주 모이를 갖다 주곤 했더니 꼭꼭 쪼아 먹고 알을 품기를 반복하더니 6월 말경 아침에 문을 열고 관찰해 보니 두 마리의 비둘기가 태어나 있었고 어미 비둘기는 먹이사냥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 마리의 형제는 서로 몸을 껴안다시피 엉켜서 꼬물꼬물 거리는 양은 차마 보기가 애처로웠고 한편으로는 앙증스럽기까지 했다. "너희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려고 어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모르느냐"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잘 자라서 날아갈 때까지 내가 잘 보살펴 주마"하고 결심을 했다.
모이를 성의껏 흩어주고 콩, 쌀, 보리쌀 등을 주었는데 콩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더 많이 주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산모는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어미 비둘기가 입으로 되새김질을 해서 새끼들을 먹여 살리는지 어린것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볼 때 신기했으며 비둘기의 생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약 5 일쯤 되는 어느 날 갑자기 이른 새벽에 소낙비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데 언뜻 비둘기 생각이 떠 올랐다.
혹시나 비를 맞고 있지나 않는지 걱정이 되어 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게 웬일입니까?" 화분에 물이 고여서 비둘기 새끼 형제가 물에 잠겨 발발 떨면서 파드닥 거리면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불쌍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당황해서 급하게 덥석 건져 내어 놓고 먼저 타올로 물기를 닦아주고 마른 천으로 둘러싸 놓았다.
"어미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하고 사방을 두루 살펴 보니 위층 계단에 두 마리가 앉아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말 못 하는 날짐승들아 보고만 있지 말고 입으로라도 물어서 건져 주지..." 하면서도 물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새끼들을 보면서 "그 어미 비둘기는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가 보지 않았더라면 다 죽고 말았겠다 하는 생각을 하니 정말 아찔하였다.
비가 내려치지 앉는 곳에 벽돌을 몇 개 쌓아 올려 둥지를 만들었다. 바닥에 신문지를 먼저 깔고 그 위에 타월 도 깔아 새끼 비둘기 형제를 옮겨 놓았다. 그리고 모이를 넣어 주고 문을 닫고 나왔다. 그제서야 큰 놈들이 내려와 모이를 쪼아 먹고 새끼를 품으며 입으로 되새김질을 해서 먹이를 주는 것을 보니 정말 신기했다. 그리하여 새끼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니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식 사랑은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문을 수리하러 온할아버지에게 비둘기 이야기를 했더니 금방 어디서 큰 박스 하나를 구해와서 문을 내고 둥지를 만들어 주면서 "여기에다 기르세요" 했다. 그 할아버지의 어린 생명에 대한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래서 형제비둘기는 다시 한번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스 안에 있는 배설물을 청소하기가 힘들어서 "얘들아, 너희들은 언제쯤이나 바깥에 나와 배설 배설할 거냐? "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약 보름쯤 지냈을까 이젠 제법 털도 복실 복실 나고 힘이 좀 생겼는지 꽁지를 문 밖으로 향하여 물총처럼 실례를 할 때도 있지만 나의 일손을 덜어 주었다 이젠 제법 둥지밖에 나와서 놀기도 하지만 아직 어려서 깨, 좁쌀 등을 주면 쪼아 먹고 큰 비둘기도 들락 날락하면서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니 기분이 흐뭇했다. 점차 날씨가더워지니 둥지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내가 문을 열면 나한테로 다가오곤 했으며 나도 궁금해서 비상구 문을 자주 열어 보곤 했다.
하루는 새끼들에게 나르는 훈련을 시키는지 계단을 하나둘씩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어느 날은 훈련이 다 끝이 났는지 어디로 날아가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걱정도 되고 섭섭하기도 하여 멍 하게 서서 건너편 옥상을 바라보니 모두가 거기로 날아가서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니 한꺼번에 모두 날아왔다. 모이를흩어 주니 신나게 쪼아 먹는 것을 보니 날 짐승도 말은 안통안 통하지만 몸짓으로짓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 신기하고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등을 쓰다듬어 주니 쑥스러운 듯 날갯죽지를 추켜올리면서 열심히 쪼아 먹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끼 비둘기는 제 혼자 많이 먹을 욕심으로 어미 비둘기를 입으로 마구 물어 뜯어 깃털이 주둥이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평화(平和)의 상징인 비둘기도 생존 경쟁에는 서로의 욕심이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어미는 점잖게 새끼들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저희들끼리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덩치도 크고 시커먼 비둘기 떼가 여섯마리나 들이닥쳐 아파트 복도 난간에 앉아 있기에 너희들도 모이가 탐이 나서 날아왔구나 하면서 제법 많은 모이를 뿌려 주었더니 우리 비둘기들은 즉시 날아와 쪼아 먹는데 낯선 비둘기들은 서먹서먹 한지 안절부절못하며 빙빙겉돌기만 했다. 양편은 서로 초긴장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나게 모이를 먹고 있는 우리 비둘기들을 보고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푸드덕 날아와모두 함께 열심히 모이를 쪼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끼 비둘기가 풀쩍 날아올라 낯선 비둘기를 물어뜯어 깃털이 빠져서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서로가 악이 받쳐서인지 물고 뜯고 몇 번을 싸우더니 새끼 비둘기가 텃세 값을 하다가 혼이 났는지 우리 현관 문 앞에 날아와 피신해 있는데 낯선 비둘기가 따라와서 기어코 멀리 쫓아 버리는 것을 보니 날짐승도 생존 경쟁에는 피눈물도 인정사정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둘기는 온순하고 평화롭고 또한 귀소성(歸巢性)을 이용하여 원거리(遠距離) 통신에도 쓰기도 하였으며 예로부터 평화의 상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약 두어 달 넘게 체험하고 직접 관찰하면서 스스로 느껴 보지 못했다면 비둘기의 생태(生態)를 실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새끼 한 마리가 보이지 않고 다른 한 마리는 건너편 옥상에서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금방날아왔다. 한마리는 생사를 몰라서 궁금 궁금하기 짝이없었다.
내 친구가 나의 생활을 보고 가더니 종종 비둘기 안부를 전화로 묻기도 하고 우리 애들은 나를 보고 "엄마는 참 부지런도 하다. 열심히 보살펴 주면 흥부네 집처럼 혹시 박 씨 줄지요?"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날짐승을 너무 가까이하면 병균이 묻어오기 쉬우니 이젠 그만하세요 하는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의를 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또 문을 열어 보면 비둘기들은 저편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푸드덕하고 날아왔다.
날짐승이지만 민첩하고 영리한 새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아쉬움을 감추고 모이는 커녕 매정하게 문을 닫아 버렸다. 얼마 후에는 창문을 열어 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비둘기 한 마리가 창문틀 위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낯익은 비둘기라 너무 반가워서 인연이 있었기에 나를 찾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모이를 넉넉하게 주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렇게도 덥던 여름도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굴복을 하고 늦가을이 다가와 찬바람이 불어오고 눈도 간간히 뿌렸다. 이 비둘기들은 어디서 잠을 자고 먹이는 어떻게 찾아 먹는지 걱정이 되었다. 인정과 인연이 무엇이길래 사람과 짐승 사이에도 서로 잊을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 앞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러 나가면 비둘기들이 많이 있어 혹시나 낯익은 비둘기가 있나 하고 유심히 살펴보아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 년이 지났는데 금년 6월에 뜻밖에도 작년 그 화분에 난난데없이난데없이 머리카락처럼 가는 철사 줄이 가로 세로 한 뭉치가 놓여 있고 깃털도 빠져 있는 것을볼 때 작년의 그 비둘기가 올해도 또 왔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고운 철사를 어디서 구해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짐승들아, 올해는 그만 접어 두자 "하고 철사 줄을 거두고 화분에다 판자 조각을 덮어 놓고 나왔다. 다음날 보니 판자조각을 뒤집어 떨어뜨린 것을 보니 틀림없이 비둘기의 소행인줄알고 그 다음에는 쓰레기 담긴 봉투를 얹어 놓았더니 단념을 했는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인간(人間)만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만물(萬物)이 더불어 살아가는장소(場所)이기 때문에 수많은 생물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와균형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세상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다.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과 소통 없이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한낱 날짐승에 불과한 비둘기도 언어 소통은 되지 않아도 아껴주고 사랑을 베풀면 서로가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나는 꽃과 자연을 사랑한다. 약 두어 달 넘게 비둘기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 주위에 친구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하는 먼 여행길을 떠나고 나 혼자 남아 있어 때로는 울적할 때도 없지 않다만 꽃을 사랑하면서 화분에 물을 주고 화초(花草)를 가까이서 보살펴 주면 내 마음이 따듯 해진다. 이런 걸걸 두고 행복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든다.
2012년 9월 9일
己未 (1919년) 生 素庵 씀
'일상 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엑상 프로방스 (Aix-en Provence), 프랑스 (3) | 2023.02.12 |
---|---|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바람의 도시 바쿠 (3) | 2023.01.27 |
천혜의 자연 환경과 자원부국, 말레이시아 (0) | 2023.01.15 |
거꾸로 말하기 (은어 사용) (0) | 2023.01.11 |
화초 키우기 (0) | 2023.0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