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상과 현실 사이
  • 이상과 현실 사이
  • 이상과 현실 사이
일상 다반사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바람의 도시 바쿠

by 용브로 2023. 1. 27.
반응형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바람의 도시 바쿠

(이글은 필자가 상사 해외지사 근무시 경험 및 추억담을 기고한 글임)

 

현지 부임전

● 이제는 기억도 으슴푸레한 오래전 일이다. 내가 바쿠란 곳에 발령을 받기 전까지는 이 도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구 소련 CIS (1991년까지 소련 연방의 일원이던 독립국가들) 국가 중 하나인 이름도 생소한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란 곳에 신규 지사를 설립한다는 사내 전자 공지를 보았다. 세계 각국 주요 도시마다 해외 지사가 개설되어 있었지만 이런 곳도 있구나 하며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지사장 발령이 났는데 같은 영업 본부의 담당 임원이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룹 최고위층의 지시로 신규 지사 설치를 한다는 것이다. 코카서스 3국에 속하는 이 나라가 접하고 있는 카스피 해저 지하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한때 20세기 초반 한때는 세계 석유 공급량의 50% 까지 점유했던 곳으로 91년 독립 후 거대 다국적 석유회사들의 투자를 유치해 카스피해 석유 가스 개발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 중에 있었고, 제2의 중동붐으로 불릴 정도로 흥청대고 있었다.

EXXON MOBIL, SHELL, BP, TOTAL 등 세계 석유 메이저 회사는 물론 굴지의 유수기업들이 모두 눈독을 들이며 이곳으로 속속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룹 차원에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유전 개발 관련 투자 사업과 대규모 SOC 인프라 구축을 위한 사업 영역과 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내정된 지사장이 개인적인 사유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후임자를 물색하던 차,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조만간 발령이 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5년간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K/L)지사 근무를 마치고 본사 귀임 한지도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또 지사 발령을 받게 되어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나라로 심정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현지 사정과 정보들을 알아보니, 구 소련 연방의 카스피해 연안 국가로 인근 아르메니아와 영토문제로 전쟁을 치른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국가로서 주재 환경이 매우 열악한 오지 지역이다. 이곳은 기존 지사가 축적한 인맥과 사업기반이 전혀 없다 보니 실제로 맨땅에 헤딩을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해외 투자 사업의 전초 기지로써 신규 지사를 설립하고 유전 개발 관련투자 Poject를 수행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이 나라는 오랫동안 구 소련 연방의 사회주의 체제와 관료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낙후된 곳이었다. 또한 자국 언어와 러시아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고는 영어 소통도 어렵다. 인종은 사실상 투루크 민족이었으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구 소련에 편입되어 70여 년 이상 터어키 와는 단절되어 있었다.

독립 후 터어키 와의 교류가 재개되고 서방 국가들과의 활발한 교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나라 대통령은 구 소련 KGB 총수인 헤이다르 알리에프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고, 여전히 구태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잔재가 남아 사회적인 구조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실정이다.

개인적으로는 PARIS, K/L, L/A 등 소위 선진국 대도시에만 주재 및 거주한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개발 도상국인 오지 지사에 그것도 당분간 단신으로 부임한다고 하니 다소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그동안 상사 해외영업 일선에서 쌓은 여러 경험들과 노우 하우들은 있기에 큰 불안감은 없었다. 다만, 자원 개발 및 투자 업무는 회사 내 업무상 필자의 전공 분야는 아니었는데 필자를 발령 낸 이유는 다소 의아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상대하며 최전방 일선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는 가질 수 있었다. 세상에 사람 사는 곳이 라면 다 살아갈 수 있고 적응해 나간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회사가 명한 대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주재 여건이 어려운 지역이다 보니 특별 오지 수당은 60 여개 전 해외지사 중 최고 수준이라고 하니 다소 위안이 된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 부임 당시 직항 편이 없어 관할 지역본부가 있는 모스크바를 거쳐 일주일 정도 현지 오리엔테이션과 적응기간을 가지고

 

모스코바-붉은-광장-크레믈린-앞에서의-사진
모스코바 붉은 광장 크레믈린

 

크레믈린-인근-아름다운-건축물-바실리-성당앞-사진
크레믈린 인근 아름다운 건축물 바실리 성당

 

 

루프트한자 Lufthansa 독일항공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 국적항공인 Aeroflot이 운항 중이었으나, 그 당시 서비스가 열악하고 항공기 자체가 노후되어 사고 발생의 우려가 커서 외국인들은 탑승을 기피하였고 심지어는 탑승 전 십자가 성호(聖號)를 그린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바쿠가 가까워 오자 구름 위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고층 빌딩이라고는 없었고 옹기종기 시골의 한 도시 같았고 나무나 숲은 거의 보이지 않고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곳이 내가 앞으로 새로이 부딪쳐야 할 운명의 땅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공항 입국 절차는 꽤나 까다롭고 곳곳에 군복 입은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어 다소 긴장이 되었다. 사전 연락이 된 현지 자동차 대리점에서 마중을 나와 있었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호텔에 짐을 풀었다. 당시 CIS 국가의 자동차 영업은 제조업체가 아닌 상사가 전권을 위임받아 대리점 관리부터 직접 관장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최고급 호텔이라고는 하나 당시 시설은 낙후되어 있었고 화장실에 있는 타월은 지저분하고 화장지조차도 갈색 두루마리로 60~70년대 수준 정도이었다. 호텔 식당에 가면 토마토와 오이에 요구르트를 섞어 놓은 것과 잼과 버터 바른 빵이 전부였다.


현지부임 후

● 현지 부임 후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생존을 위한 의식주 문제의 해결이다. 일단 호텔 생활을 하게 되었고 먹는 것은 대형 여행 가방에 잔뜩 가지고 간 김치와 라면등 한국 음식들로 당분간 버티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바닥이 났다. 다음으로 숙소도 구하고 사무실 계약, 정부기관에 법적인 지사 등록, 현지인 채용, 차량 구입, 거래선 방문 인사, 현지 교민 접촉 등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시내 중심가가 대부분 노후된 건물이다 보니 최적의 위치와 최적의 규모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몇 안 되는 5 스타급 호텔 중 신축 유로파 호텔이 있었는데, 이 호텔 1층 객실을 개조하여 사무실로 썼다. 호텔 입구에 회사 로고와 함께 크게 문패를 만들어 달았다. 복도 맞은편에는 일본의 미쯔이 상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임전 생존을 위한 러시아 어를 속성으로 주요 용어 정도를 익힌 바 있으나 겨우 구사한다는 게 쓰빠씨바/땡큐, 하라쑈/굿, 다/예스, 니에트/노, 스콜까/하우머치 수준이었다. 언어소통에 어려움이 있으니 현채인 통역을 구하는 것도 급선무이었다. 신문 광고를 내니 지원자 이력서가 수백 통이 왔고 면접 후 국립대 영어과 출신을 구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 업무적으로는 우선 과제인 유전 개발 관련 메이저 석유회사와 유망 광구에 공동 지분 투자이다. 관할 기관은 우리나라의 국영 석유공사 격인 SOCAR 와의 긴밀한 접촉이 중요했다. SOCAR는 100% 정부 지분으로 석유 자원 개발 및 수출로 국가 경제를 유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대통령 직속 정부기관이다.

SOCAR는 해상 유전지대를 광구별로 나누어 석유 메이저사와 컨소시엄 형태로 탐사 시추 채굴 운송 계약을 체결하고 유전개발을 하는 것이다. 일부 지분 인수를 하더라도 적어도 수억 달러는 소요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억 불이라면 엄청 큰 투자금액으로 보이나 계열사 중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LNG 선(액화천연가스 운반선)이나 VLCC (초대형 유조선) 1척 혹은 OFFSHORE PLATFORM (해양 시추설비) 1 기만하더라도 수억 불이니, 이런 선박과 해양설비를 1년에 수십 척 건조하는 것을 감안하면 전체 그룹차원에서 보면 큰 문제는 아니다.

BP (British Petroleum) 1개 메이저사 가 카스피해 유전 개발에 20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하니 유전 개발 전문 기업은 아니지만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또한 해저 석유개발을 위한 해양 설비 건조 기술은 선박건조와 함께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어 투자와 연관된 사업 추진 분야이기도 했다.

● SOCAR 사장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실세 중의 실세이다. (일함 알리에프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 대통령임) 모든 일을 매끄럽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막대한 석유 자원으로 얻어지는 국가적인 부가 국민 전체에 돌아가는 혜택은 크게 제한적이고 일부 소수 유력 인사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향유되는 것은 신생 국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카스피해는 지정학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사실상 엄청난 큰 호수인 셈이다. 내륙 깊숙이 너무나 큰 호수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를 바다로 간주한다. 잔잔하지만 실제로 파도가 치기도 한다. 인근 5개국이 카스피 해를 끼고 있어 이곳 해저 석유 자원 개발을 둘러싸고 영유권 분쟁으로 오랜 기간 마찰과 타협 내지 조정이 있었다.

● 해저에서 채굴된 원유는 파이프 라인으로 내륙을 가로질러 조지아 (현지어로 그루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경유하여 흑해 연안의 항구를 통하여 유조선으로 서방 세계에 공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 개발이 본격화되면 경제적인 대규모 공급을 위하여 바쿠에서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제이한 항구까지 1,760 킬로에 육상 파이프 라인을 건설하는 국가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이는 한반도 종단길이의 2배 정도에 이르는 대규모 토목 사업이다. 당시 서방 국가와 합작으로 약 30억 달러 규모의 세기적인 건설 및 기자재 공급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었다. 후일 필자가 본사 귀임 후 2005년경에 완공되어 제이한 항에서 바쿠산 원유가 첫 선적이 되었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파이프 라인 지도
파이프 라인 지도



아제르바이잔이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拜火敎)로 알려진 조로아스트 교가 한때 번성했었고 지금도 유명한 배화교 사원이 있다. 이것은 매장된 석유와 가스 자원과 무관하지 않다. 땅에서 기름이 솟고 가스가 올라오니 불을 붙이면 자연적으로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근 국인 투르크메니스탄 도 세계 제일의 가스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 지역 일대는 기름 밭(유전지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참 후 007 영화에서도 바쿠가 로케이션 되어 나온 적이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아제르바이잔이 불의 나라라면 수도인 바쿠는 바람의 도시이다. 카스피 해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텔 사무실에 밤늦게 불을 밝히고 이런저런 업무 중일 때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정말 대단했다. 코트를 껴 입고 퇴근도 못한 채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기가 일쑤였다. 운전하기가 겁이 날 정도이니 이 도시의 바람은 정말 대단했음을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주재 기간 동안 업무와 관련된 무용담(武勇談)이나 후일담을 모두 기술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생략하고 다음 몇 가지 개인적으로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카스피해에서 잡히는 철갑상어 (sturgeon)와 소금에 절인 철갑상어알 (caviar)은 미식가들이 알아주는 세계 최고의 품질로 유명하다. 버터와 함께 빵에 발라 먹는다. 스미르노프 보드카에 안주 삼아 먹으면 그 짭짤한 맛과 풍미가 일품이다. 캐비아 말고 철갑상어 자체도 튀기거나 구워 시내 음식점에서 판다.

한때 필자가 이곳 캐비어가 그렇게 유명하니 혹시 현직을 떠나면 캐비어 국내 대리점권이라도 얻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공급라인은 다 구축되어 있었고 요즘은 국내에서 철갑상어를 양식까지 한다니 쓴웃음이 나왔다.

● 또한 이곳 역시 무슬림 국가라 먹거리로는 양고기를 주식처럼 먹는다. 양고기를 삶으면 그 구린내가 구역질이 날 지경이나 이곳 사람들은 양고기를 즐겨 먹는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피르졸라 라고 하는 양갈비 구이는 식욕이 절로 나게끔 기름이 잘잘 흐르는 것이 그 싱싱한 생갈비 고기의 쫄깃쫄깃한 맛은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필자가 이곳 유력인사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지은 아파트의 외부는 페인트 칠도 없이 흐름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혀 다른 세상이다. 온갖 장식과 가구, 고급 전자제품들을 보니 과거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적인 부를 향유하고 있는 방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 한국 교민이라고는 자동차로 먼저 진출하여 바쿠 시내 택시를 기존의 러시아산 구형 깡통차인 LADA를 한국산으로 갈아치워 버린 D사, 시내 곳곳에 한국산 가전제품광고가 눈에 띄었던 L전자 등이 있었고, 선교사 부부, 대학에서 한글을 가르친다는 노교수 부부 등 10여 명이 전부이었다. 한국 음식점, 일본 음식점은 전무하였으나 중국음식점은 시내 지하 한 곳에 있었는데 크게 입맛에 맞지는 않았지만 경쟁사인 D사 법인장과는 자주 어울리던 곳이었다.

한국 음식이 없다 보니 본사와 상의해서 두바이 까지 비행기로 두세 달에 한번 정도 시장을 보러 갔다. 두바이는 그곳에 정박하는 한국 원양 어선 선원들에게 선식(船食)을 공급하는 회사가 있었다. 대형 냉동 창고에 한국 음식은 없는 게 없었다. 몇 박스 씩 구매해서 공수하여 생활하니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었다. 비행기 타고 외국에 시장을 보러 갔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바쿠 시내에서 차를 운전하다가 보면 거의 매 블록마다 경찰들이 숨어 있다 나타나며 흰 곤봉으로 차를 세운다. 특히 외국인 차량은 주요 타깃이다. 아무런 위반이 없는데도 면허증 제시 및 트집을 잡기가 일쑤다. 이 때문에 주요 미팅 시간에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차차 적응이 되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다.

차 안 콘솔 박스에 아예 현지화 마나트(Manat)를 가득 채워놓고 걸릴 때마다 그냥 세지도 않고 한 움큼씩 집어주면 무사 통과하고 심지어는 경례까지 한다. 현지화인 마나트 지폐는 당시 지폐 종이가 낡아서 거의 낙엽 같았다. 과거 우리나라도 운전을 하다가 걸리면 운전면허증 밑에 지폐 몇 장을 같이 쥐어주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쉽게 해결되는 것은 개발도상국의 민낯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 번은 계열사 회장이 출장을 온다는 연락을 받고 공항 영접을 가야 하는데 통상 일반인들은 입국 수속이 꽤 시간도 걸리고 까다로워 좀 걱정이 되었다. 현지 대리점과 상의하였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바쿠 공항은 국제공항이라지만 보딩 브리지도 없을 때이다. 도착일 우리들은 공항당국의 특별 허가를 받고 영접 차량을 비행기 활주로 도착 지점 바로 앞에 대기시켰다.

트랩에서 내려오던 회장께 인사를 했더니 어리둥절 해하며 놀라는 기색이었다. 일반 승객들이 샤틀 버스로 입국대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곧바로 VIP 라운지로 직행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쉬는 동안 현지인들을 시켜 급행으로 대리 입국 수속을 하고 짐을 찾아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본인도 장시간 비행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이 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최고의 VIP 의전
(儀典)을 받았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쁠 리가 있었겠는가. 상사 맨들의 현지 의전 업무는 주 업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이런 지역에서는 이른바 당국에 오찌 (뇌물)를 찔러주면 대부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마무리하면서

그때가 90년대 말이니까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기억에서도 점점 지워져 가고 있지만 당시 거침없이 펄펄 날아다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바람의 도시 바쿠에 전진기지를 설립하고 사업 추진에 몰두했으나 경제 환경 변화와 그룹 정책 변경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값진 경험을 하였다.

지금은 이 나라도 석유 자원 개발로 국가 경제가 많이 발전하였고, 우리나라와도 상당히 물적 인적교류가 많다. 관광객도 많이 간다고 하니 그때 와는 격세지감이 있다. 선진국 대도시에 대해서는 다들 워낙 잘 알기 때문에 호기심도 적을 것 같아 주제로 삼지 않았고, 중앙아시아 내륙에 위치한 신생국가의 수도 오지 바쿠에서의 과거 추억담을 늘어놓았다.

회사 사정상 바쿠에서 인근 국가인 터키 이스탄불 지사로 바로 이동하라는 본사의 전보 발령을 받았다. 그 후 주재했던 바쿠는 이스탄불에서 그리 멀지 않아 관련 업무상 자주 방문 했고, 인근 관할지역 국가도 업무상 자주 방문 하면서 약 5년간의 지사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스탄불은 국제화된 도시로 그야말로 바쿠에 비하면 비교할바가 안될 정도로 좋은 주재 여건이었고 사업환경이었다. 하지만, 주재기간 중인 1999년 이스탄불 근교에서 발생한 아찔했던 대지진무려 3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고, 지사 사무실이 있는 고층빌딩 콘크리트 벽이 갈라지고, 심야에 자다가 황급히 뛰쳐나와 아파트 공터에서 공포 속에 집단 노숙을 했던 경험등,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소개할만한 적지 않은 에피소드는 꽤 있지만, 오늘 나의 오지 해외 주재 체험담은 여기에서 이만 줄이고자 한다.

 

바쿠-시내-중심가-전경-사진
바쿠 시내 중심가 전경

 


 

당시-사무실-에서-필자-사진
당시 사무실 에서 필자

 


 

 

Signing ceremony
Signing ceremony

 

 


 

반응형

댓글